1학년: 실패해도 용서되는 학년
영국 학사과정 1학년의 성적은 최종 졸업성적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대학교에 처음 들어가면 대개 신입생들 사이에선 ‘1학년때 실컷 즐기고 2학년때부터 열심히 하자!’라는 분위기가 형성되곤 하지만, 사실상으로 1학년은 결코 느슨해져는 안되는 중요한 학년이다. 전공과목의 기초입문지식은 모두 대학 1학년 과정에 포함되어 있다. 게다가 영국 대학은 1학년과 2학년의 학습강도 차이가 상당히 큰 편이라 1학년때 공부를 열심히한 학생에게도 2학년은 어김없이 ‘고비의 학년’이다. 그런 상황에서 낙제점을 겨우 면한 1학년 성적으로 2학년을 맞는 학생들은 성적을 관리하기 위해 남들은 1학년때 마스터한 입문서를 심화 전공서적과 함께 읽어야하는 이중고에 시달리게 된다. 좋은 졸업성적, 특히나 1등급 ( first class) 졸업장을 목표하는 학생들은 이 1학년의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한다. 내가 졸업한 학과의 경우에만 비추어 볼 때도, 1등급으로 졸업한 학생들의 95%이상은 모두 1학년때 누구보다도 공부를 열심히 했던 학생들 이었다.
돌이켜보면 나의 1학년 생활은 졸업학년 때보다도 더 우울하고 힘들었다. ‘연습학년’ ‘1등급을 받기위한 실험의 학년’ 이라는 것을 염두하고 이 공부방법, 저 공부방법, 이런 스타일의 에세이, 저런 스타일의 에세이를 죄다 써보았으니 좌충우돌의 시간이었을 수밖에. 물론 처음부터 실수하고 실험정신을 발휘할 마음은 아니었는데 해답이 없는 대학공부를 열심히 하려다보니 전략을 짜보고 속된말로 ‘어떤 스타일의 답안/ 논증’이 먹히는지 실험을 해야했고 그러던 과정에서 여기저기 자꾸만 시행착오가 터졌다. 지금 생각하면 ‘귀여운(?) 과제 몇 개’ 에 불과한 에세이가 나를 어찌나 괴롭혔던지 만나는 사람 열이면 열에게 죽겠다고 푸념만 늘어놓던 나날들이었다. 대학용 에세이를 쓰는 법도 모르는데, 난생 처음해보는 참고문헌 주석 (reference)넣는 방법은 어쩐지 메뉴얼부터 획일성이 없었고, 교수들이 위협용으로 학생들에게 이야기하는 ‘채점용 에세이 표절감식 프로그램’은 왠지 내 힘으로 쓴 내 에세이도 뭔가 트집을 잡아 나를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뜨릴 것만 같았다. 게다가 갖은 애를 써서 열심히 쓴 1학년 첫 에세이는 여러모로 실패한 에세이의 일례로 5분도 넘게 노교수님에게 악의없는 도마질을 당했으니. 겁먹고 혼란스러워 하던 나에게 어떤 친구들은 ‘어차피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진심어린 조언을 해주었지만, 그 어떠한 말들도 나를 안심시키지 않았다. 지금 내가 걱정하고 힘들어하는 것들을 1학년때 확실하게 정리해 놓지 않으면 이것들이 졸업점수가 포함되는 2, 3학년때 나를 더욱 힘든 상황으로 빠뜨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혼란스런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내가 택한 방법은 내 손으로 내가 모르는 부분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교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이었다. 1학년부터 나는 에세이를 본격적으로 쓰기전 무조건A4용지 1페이지 분량의 뼈대를 잡아 내 에세이의 도안이 괜찮은 논증인지 무엇이 보강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자세한 면담을 거친 후 에세이 쓰기를 시작하는 습관을 들였다. 또한, 주석다는 법의 획일성없는 메뉴얼이 헷갈릴때면 늘 과목교수님에게 문의를 거치는 습관을 들였다. 공부하다가 무슨 의문거리만 생기면 포스트잇을 적어놓고 상세한 문의 이메일을 보내고 참새가 방앗간 들듯 교수실에 왔다갔다 거렸으니 1학년때의 내 손과발은 졸업학년 때보다도 바쁜지경이었다. ‘꾸준한 것에 장사없다’고 했던가. 끝이없어 보이던 내 질문은 1학년 말쯤엔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고, 나는 대학 학습문화에 점점 감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초장에 잡아놔야 나중에 안힘들다’라고 생각하던 나의 예감은 적중했다. 내가 1학년때 헷갈려하며 고군분투하던 부분들을 다른 학생들은 2,3학년에 가서야 걱정하기 시작했다. 2학년 말, 3학년 초반엔 교수실 앞은 내가 1학년때 하던 걱정을 뒤늦게 하는 우리과 학생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독립심, 독립심? 독립심!
‘그건 네 스스로 해야지.’ 내가 영국에서 공부하면서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 교수님들, 하물며 대학 행정부서 직원에게서까지 귀에 딱지가 지도록 들었던 서운한 말이다.이젠 왜 그랬는지 이해하면서도 아직도 그 순간순간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안하기만 하다. 정치외교라는과목을 전공해서인지, 필자는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시아권 학생들은 고사하고 유럽권에서 공부하러온 외국인도세명도 안되는 아주 영국적인 환경에서 대학시절을 보냈다. 주변 친구들은 ‘넌 정말 학비 제대로 쓰는구나, 아주 진짜유학이네.’하며 부러워했지만 그 시절 나는 극심한 문화차이와외로움에 위장병과 두드러기를 달고 살 정도로 심신이 지친 나날을 보냈다. 같이 고민을 나눌 유학생 친구들도없었고, 그나마 아는 유학생들은 다른 과목을 전공하고 있어서 만나기조차 힘들었다. 영국 학사과정은 한국처럼 교양과목이 없고 3년내내 ‘오로지 전공과목’만수강가능해서 아무리 잘 지내는 친구들이라도 전공과목이 다르면 여가시간과 도서관에서 공부할 때 외엔 교류하는 것이 매우 힘들어진다. 그런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나는 영국대학과 한국대학의 조직문화의 차이점을 극심하게 느꼈다.
영국의 조직은 ‘자신의 소관의 안팎’을 매우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말은 자신의 소관이 아닌일에 과잉친절을 베푸는 일이 아주 드물다는 뜻이다. 교수진이나 대학행정부 사람들은일을했던 연륜으로 학생이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 대충 짐작하고 있어도 그 일이 자신의 소관이 아니다싶으면 ‘내가 여기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며전화번호나 이메일 주소를 주며 학생의 발품을 팔게 만든다. 이성과 합리성이 공감과 인심보다 최소 십리는 앞서있는 환경이다. 일례로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교수님께 따뜻한 격려와 학업상담을 받고싶어 찾아가면교수님들은 학생이 원하는 말 -잘하고 있다는 격려, 진로에대한 진지한 이야기- 대신에 그 학생의 상황을 학생관리센터라는 부서에 넘겨버리고 그리로 찾아가라는 친절(?)을 베푸신다. 수업내용에 대한 질문, 에세이를 쓰는 법, 에세이용 대학언어가 헷갈려서 찾아가는 경우에도마찬가지다. 질문을 한 학생의 케이스를 관련부서로 넘기거나 열 개도 넘는 추천도서 목록들만 조목조목알려주실 뿐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어떤 교수님들은 네가 도서관에서 책이나 읽어보고 와서 나에게찾아오는 것이냐며 면박을 주고 돌려보내는 경우도 적지않다. 학생의 급박한 상황보다 ‘자신들이 제공한정보’와 ‘도서목록’을 읽어보려 시도하지도 않고 자신들이 급박하다고 알려달라고 오는 학생들의 나태함을 꼬집어 나무라시는 것이다. 차라리 그렇게 대놓고 나무라시는 분들은 그나마 그 분들 나름대로 인심(?)을쓰는 분들이시다. 어떤 교수님들은 자신의 수강자료에 써져있는 내용을 학생이 읽지도 않고 질문을 한다고판단되면 그 학생의 문의이메일에 아예 답장조차 안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영국 조직사회의 풍토가 언어적으로약자인 유학생들을 굉장히 외롭게 만들지도 모른다. 특히나, 자신의상태와 어려움을 표현하는 것에 자존심 상해하고 부끄러워하고 말하지 않아도 저쪽에서 눈치껏 도와주겠거니 하는 소극적인 자세를 가진 학생들은 더욱더힘들 것이다. 적극적으로 뭔가를 물어와도 학생이 제대로 알아보고 물어보는 것인지 판단하고 답변을 해주는판에.
하지만, ‘저기 죄송하지만 제가 유학생이라...뭘 잘 몰라서...’, ‘저기죄송하지만...제가 너무 급해서’라는 식의 어법으로 도움을 청하는 자세는 영국 조직사회에서 이해되는자세가 아니다. 그런 감정에 호소하는 어법대신에 합리적인 어투로 부탁을 하는 것이 좋겠다. ‘교수님, 수강자료에 이해가 되지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 ~한 부분에서 설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라거나‘교수님, ....의 책의 어느부분이 잘 이해가 가지않습니다. 찾아뵈어도되겠습니까?’ 라는 어투로 부탁을 한다면, 누구보다도 친절하게학생을 도와주려 힘을 쓸 것이다. 영국 조직사회의 좋은점은 ‘무언가를 못 이해했다고’ ‘무언가를 모른다고’무능력하게 그것도 모르냐며 사람을 나무라는 경우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스스로 시도해보지도 않고’ 그저 해결되겠지 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에게는 놀라울정도로 냉정하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부탁도 부지런하게미리미리 해야 할 것이다. 영국대학에서 무언가를 해결하려면 한국 대학에서보다 부지런한 발품이 많이 요구된다. 행정부서나 교수진을 포함한 영국대학의 직원들은 대개 특수상황이 아니면 자신들의 평소 페이스와 속도로 일을 처리하려는경향이 있어, 어떻게 빨리 해결되겠지 하며 미루는 것이 습관인 학생들은 학사시절에 큰 낭패를 볼 수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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