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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유학닷컴 소식

Gsu 쌤 영국 이야기 04 – 2003년 7월 영국으로의 귀환, 생존가능성 타진!!!



스마트 폰에 로그인 서비스가 생긴 후 다녔던 지역들인데… 참 많이도 싸돌아 다녔네요 ㅋㅋ

2002년 12월 이후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리라는 조금은 무모하기도 한 계획을 세우고 7월까지 무모하리만큼 닥치는대로 일을 해서 모은 돈으로 다시 영국이라는 나라에 발을 딛게 됩니다.

그때가 2003년 7월, 처음 정착한 지역은 리버풀의 톡스테스 (Toxteth)라는 지역인데 예전 마가렛 수상시절 폭동으로 유명했던 지역이었죠.
정부가 의도적으로 국가공기관들을 법인화시키고 자유무역경쟁을 채택하면서 국내 기업들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북서지방의 리버풀과 북동지방의 미들스브러가 가장 큰 타격을 받게 되는데 위에서 언급한 폭동도 그당시 노동자들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며 미들스브러의 경우 영화 및 뮤지컬로도 유명한 빌리 엘리엇에서 잘 표현되어 있기도 하죠.



이번 마가렛 전 수상의 사망소식이 전해진 이후 해외에서는 철의 여인의 사망소식에 애도를 표했지만 사실 영국내에서는 많은 파티가 열렸던 웃픈 헤프닝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암튼 2003년 제 형편으로 잡을수 있어던 작은 원룸아파트는 (영국에서는 FLAT 이라고 합니다) 이런 지역밖엔 없었죠. 아래 사진은 제 첫 Flat이 있던 St. Bride Street입니다.



이후 3개월이란 기간동안 직장을 구하지 못하게 됩니다. 나름 한국에서 어린나이에 사장까지 해봤던 저에게는 알바일을 하기에는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었던거죠. 지금 생각해보면 현지인들에게 저는 단지 영어 못하는 동양인이었던거죠. 자존심을 버리는게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요.

이후 돈은 떨어져가고 해서 자주 가던 키모스 (Kimo’s)라는 무슬림계 할랄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카페에서 접시닦이를 시작하게 됩니다. 리버풀 출신들에게는 꽤나 알려진 맛집으로 특히나 제가 일하던 대학가 근처의 작은 분점이 더 유명합니다. 지금 리버풀에 있거나 앞으로 리버풀 여행계획이 있으신 분들께 강추요 ^^



아래 사진은 모하메드라는 친구고 제가 처음 일할때부터 같이 일하던 친군데 영국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들렀을때 여전히 일하고 있더군요. 이날 이 친구가 저도 몰랐던 얘기를 해줬는데 제가 유일하게 무슬림이 아니면서 주방에서 일을 했다고 하더라구요. 괜찮은 친굽니다. 이글 읽고 담에 이 카페 들르시는 분들은 제 안부 좀 전해주세요. ^^



그렇게 접시닦이로 시작해서 어느정도 피자까지 만들게 됩니다. ^^ 이 집은 케밥도 맛있지만 피자 또한 유명한데 지금 생각하면 저도 그 피자를 만들던 사람 중 한명이라는 이유에서 조금 뿌듯해 지기도 합니다.

여기서 잠깐!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당시 제 영어수준은 거의 바닥이었습니다. 정식으로 배워본적도 없었으니까요. 고작 해봤자 클럽디제이 시절 알게된 외국인 친구들과 겨우 의사소통 정도? ^^;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제 후배들에게 얘기합니다. 영어는 언어이며 언어는 학문이기 이전에 의사소통이라고. 그로인해 부딪혀서 배워야 한다고. 아기들이 엄마에게 배고프다는걸 알리려고 문법공부 하는건 아니니까요. 할 수 있는건 울면서 그냥 부딪혀 봤더니 엄마가 젖을 주길래 그렇게 원하는걸 하나씩 얻어가며 언어라는 수단을 배우게 되는겁니다.

감히 휴대전화기는 꿈도 못 꾸던 시절이라 싸구려 녹음기를 하나 샀습니다. 그리곤 제 주위 사람들이 얘기할때 녹음을 하고는 저녁에 일마치고 집에 가서 노래연습하듯이 녹음기 틀어놓고 미친듯이 발음연습을 했었죠. 원래 태생이 딴따라라 그리 어렵진 않더군요. ㅋㅋ

그렇게 6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 2004년 1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6개월이라는 시간을 영국에서 보내며 느꼈던건 해볼만하다라는 것이었죠.

제 앞에 비자라는 문제가 그렇게 큰 장벽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채 2002년때 보다 더 큰 희망을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 진정한 Doggy 고생은 다음에 투 비 컨티뉴드…


Gsu 쌤


Gsu쌤_이근수 copy